나바위 성당 김민성
전북 익산시 망성면에는 '화산'(華山)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다. 산세가 너무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아름다운 산 중턱에는 '화산' 이름과 맞춘 듯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나바위성당'이 있다. 1897년 본당 설립 당시 '화산본당'이란 이름으로 불렸지만 1989년부터 '나바위성당'이라고 불렸다. 화산 산줄기 끝자락에 광장처럼 너른 바위가 있는데 이 너른 바위에서 이름을 따와 '나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바위성당은 1906년 순수 한옥 목조건물로 지어진 후 1916년까지 증축을 거듭하면서 한·양 절충식 건물로 형태가 바뀌었다. 나바위성당은 이 독특한 건축 양식 때문에 1987년 7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성당을 소개하기에 앞서 화산 나바위가 한국천주교회 성지로 자리 잡게 된 연유를 살펴보자. 화산 나바위가 한국천주교회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845년 10월12일이다. 이날 밤 8시경 전라도 강경 황산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입국, 첫발을 내딛는다. 김 신부 일행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다블뤼 신부, 그리고 김 신부 사제서품식에 참석했던 조선 신자들이었다. 이들이 타고 온 배는 김 신부가 명명한 '라파엘호'였다. 아마도 라파엘호는 이날 김 신부 일행을 나바위에 무사히 올려놓고 운명을 다했을 것이다. 만약 주민들이 낯선 배가 포구도 아닌 곳에 정박해 있는 것을 목격했다면 분명히 관가에 신고를 했을 것이기에 김 신부 일행이 스스로 라파엘호를 침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추리일 뿐 라파엘호의 운명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 신부 일행은 현지 신자 도움으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 상복을 입혀 상주로 변장시킨 후 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지샌 후 곧바로 상경했다.
현재 행정구역상 전북 익산시에 속하는 '나바위'는 조선시대 당시에는 은진군 강경현에 속해 있었다. 강경에는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알리던 봉화대가 있었다. 또 뱃길로 실어 나르던 정부미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서 '나암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강경 지방 첫 가톨릭 신자는 이중필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1800년 서울 벽동에 사는 정광수(바르나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세례를 받았다. 강경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한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진 시기는 1839년 기해박해 때다. 이런 나바위에 신앙 터전이 마련된 것은 1882년 공소가 설립되면서부터다. 이후 1888년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전라도 복음화 교두보로 이곳에 본당을 신설하고 초대 주임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요셉 베르모렐(한국명 장약실) 신부를 임명했다.
베르모렐 신부는 화산과 산에 딸린 농경지를 당시 돈 4000원에 매입, 성당 부지로 정했다. 그는 참혹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는 신자들을 보고, 형편이 허락하는 한 많은 대지와 전답을 사들여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농토나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빌려줄 작정이었다. 그때 심정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농토가 없는 사람들은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를 지을 수만 있어도 큰 행복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돈이 있다면 논을 사서 외교인 틈에서 외롭게 사는 신자들을 이주시켜 좋은 신자 부락을 만들고 싶다. 배고픈 조선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그들을 신자로 만들고 싶다."
베르모렐 신부의 이러한 태도에 감동한 주민들은 집단으로 개종해 본당이 세워지자마자 어른 87명이 세례를 받았다. 베르모렐 신부는 1905년 성당 건축을 계획하고 약현성당(현 서울 중림동성당)과 용산신학교를 설계했던 프와넬 신부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1906년 설계가 완성되자 곧바로 착공에 들어간 베르모렐 신부는 나바위에서 약 30리 떨어진 임천군 가하면 지저동 뒷산을 1000냥 100푼을 주고 매입, 곧게 뻗은 소나무들을 베어 뗏목으로 운반해 건축 목재로 사용했다. 성당 공사를 중국인 기술자들이 맡아 했으나 본당 신자들도 한 몸이 되어 터다지기와 목재 운반 등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신자들은 또 하루 밥 한끼 먹기도 힘든 궁핍한 삶에도 성의껏 성당 건립기금을 내놓았다. 이렇게 나바위성당은 가난한 신자들 헌금과 노력 봉사, 희생 위에 세워졌다. 1907년 12월 완공된 나바위성당은 순수 한옥 목조 건물로 지어졌다. 흙벽 기와지붕에 나무로 만든 종탑과 마루바닥이 전부였지만 베르모렐 신부와 신자들의 기쁨과 긍지는 대단했다. 1909년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종을 종탑에 설치했고, 1911년 9월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 주례로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나바위성당은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페랑 신부와 미국 교회 도움으로 1916년 대대적 개수 증축 공사에 착수, 흙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종각을 증축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나바위성당은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다. 성당 앞면은 고딕양식의 3층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로 꾸며져 있고, 지붕과 벽면은 전통 목조 한옥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기와지붕 아래에는 '팔괘'를 상징하는 팔각 채광창이 사방으로 나 있고, 처마 위마다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성당 내부도 현대 건축양식에서 맛볼 수 없는 분위기와 재미를 준다. 바닥은 얼음 표면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 있다. 성당을 처음 지었을 때 깔았던 나무 그대로다. 양말을 뚫고 머리 속까지 얼얼하게 하는 한기와 발바닥 전체에 와닿는 매끈한 촉감이 신선하다. 제대를 중심으로 중앙 통로 한가운데 일정 간격으로 세워진 기둥은 '남녀 신자석'을 구분하는 경계였다. 제단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전, 사제가 신자석에 등을 돌린 채 미사를 봉헌하던 옛 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제대 위 예수 성심상과 촛대, 감실 등도 성당을 처음 지었을 때 들여왔던 그대로다. 이 제대는 초대 본당주임이었던 베르모렐 신부가 프랑스와 중국에서 제대 부품을 몰래 들여와 조립한 것이다. 옛 제대 바로 옆 제대에는 1995년에 전주교구청에서 옮겨온 김대건 신부 성해 일부가 안치돼 있다.
성당 뒷편에는 야외 제대와 '평화의 모후' 성모 동산이 꾸며져 있고, 화산 정상까지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화산 정상에 오르면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와 '망금정'이 있다.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는 1952년부터 2년간 당시 주임 김후상 신부와 신자들이 모금한 60만환으로 후임 김재덕 신부(훗날 5대 전주교구장 주교를 지냄)가 1955년 건립했다. 화강석 축대 위에 설치된 순교 기념비는 총 높이가 4m50cm로, 이곳이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첫 발을 내디딘 곳임을 알리기 위해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와 똑같은 크기로 지어졌다. 순교 기념비 뒷쪽으로는 금강 황산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금정'(望金亭)이 있다.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교구 사제들 피정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망금정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으나 1925년 일본인들이 이 일대를 간척하면서 금강 줄기가 바뀌어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뒤덮인 평야로 변했다.
나바위성당은 1991년 '피정의 집'을 건립, 운영해 오고 있다. 본당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지어진 피정의 집은 연건평 740평 3층 건물로 야영장, 수영장, 운동장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청소년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김대건 신부의 복음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나바위성당은 민족의 수난과 애환을 함께 나눈 삶의 자리이기도 했다. 초대 주임 베르모렐 신부는 지역 유지 김두환·서재양·박익래·강인수·박준호씨와 함께 1908년 성당 안에 소학교(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설립, 운영했다.
베르모렐 신부와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국가 대본은 교육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이 힘"이라고 가르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24년 강경공립학교 가톨릭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해 퇴학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사회문제로 불거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계명학교는 일제 에 의해 강제 폐교됐다.
1929년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약슬 신부는 '계명학교'를 복교해 학생들을 다시 가르치고 계속해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한 김영호 신부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석방되는 고초를 겪었다. 계명학교는 1947년 11월 재정난으로 폐교됐다. 나바위성당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점령됐으면서도 미사가 끊이지 않은 유일한 본당이었다. 당시 본당 주임 김후상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는 목자가 아니며, 미사를 지내다가 죽으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는 일념으로 피신하지 않고 미사를 봉헌했다고 한다. 본당 신자들은 '인민군 자위대원'을 자원해 김 신부를 보호했다. 나바위성당은 또 1949년 간이진료소인 '시약소'를 설립, 1987년 폐쇄할 때까지 40년 가까이 가난한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아 왔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본당 수녀들은 시약소에 의원 못지않은 의료기구를 갖추고 간단한 수술까지 했다. 나바위성당은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순례 성지로 지정된 이후 전국 많은 신자들에게 사랑받는 신앙 명소로 자리 잡았다. (나바위성당 제공)